블로그 이미지
저널리스트를 꿈꿨던 10년차 약사입니다. 신문과 방송 속 의약보도를 꼼꼼하게 읽고 필요한 정보를 나눕니다. Ms.삐약이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5)
의약보도 (8)
약 이야기 (0)
일상 (0)
마음 따뜻한 사람들 - 열린 의사회 (6)
Total
Today
Yesterday

 

 

 

 

마음 따뜻한 사람들, 열린의사회의 활동을 응원하는 온라인 서포터즈의 막내 슬연양이 필리핀 의료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일요일 출국했다. MERS-CoV의 영향으로 잠시 멈췄던 열린의사회의 따뜻한 발걸음, 신발끈을 고쳐매고 떠나는 곳이 필리핀이라니, 뜨거웠던 작년 5월의 필리핀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 본다.

 

 

 

내가 약사라는 사실이 드물게 뿌듯해 지는 순간. 열린의사회 의료봉사를 떠나며 공항에서 받은 이름표와 안내책자

 

<열린의사회, 104차 의료봉사>

 

귀하는 여행제한지역을 포함한 국가를 여행 중 입니다. 제한지역 체류 여부를 확인하기 바랍니다.”

빠듯했던 진료 일정을 마치고 도착한 타클로반 공항, 모두의 핸드폰으로 날아든 외교부의 경고 문자에 다들 피식, 웃고 말았다.

 

교민 피습 사건이 일어난 앙겔헤스, 내전 때문에 진짜 여행제한지역인 민다나오, 평온하기 그지없는 세부와 보라카이 섬 까지 너무 많은 섬들도 이뤄진 필리핀 이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낯선 곳, 타클로반에 첫 발을 내딛던 새벽에 저 문자를 받았더라면 움찔 했을지도 모르겠다.

 

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미리 만난 타클로반의 모습들은 하이옌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울부짖는 모습, 이 지역에서만 오천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던 사실 등 그야말로 앞이 깜깜. 쉬워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휘어진 전봇대, 앙상한 뼈대만 남겨진 집, 하이옌 이전엔 마을이 있던 곳 이다. .ⓒ열린의사회> <쓰러진 전봇대가 집을 완전히 덮쳤다. 마당의 빨래들이 말해주듯 여기도 아직 사람이 산다.ⓒ열린의사회>

계획보다 하루 적은 3일의 진료를 마치고 돌아서는 우리에게 타클로반은 절망의 도시도, 슬픔의 도시도 그렇다고 공포의 도시도 아니었다. 사소한 친절에도땡큐로 답할 줄 알고 하얀 이가 드러나 보이는 환한 미소가 일품인 우리의 또 다른 이웃들의 삶터 일 뿐이다.

 <타클로반의 우리 이웃, 진료소를 찾은 꼬마. 큰 눈이 인상적이다. .ⓒ열린의사회>

 

타클로반, 짧았지만 유익했던, 한국의 여름 찜통더위를 연상케 하는 한 여름밤의 꿈, 그 기억을 지금부터 더듬어보려고 한다.

 

<봉사단, 타클로반을 만나다>

 <공항 바로 바깥, 우리가 마주한 타클로반의 첫 시내 모습 ⓒ열린의사회>

비행기 문을 나선 우리를 맞는 건 공항과 비행기를 연결하는 작은 버스가 아니었다. 철골구조가 앙상히 드러난 단층 건물. 그 흔한 유리창 하나 없이 활주로와 연결된 대합실, 아직도 하이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공항이다. ,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을 토해내는 자동식 컨베이터 벨트 대신 사람이 날라다 부서진 컨베이어 벨트위에 옮겨두는 가방, 있으나 마나한 컨베이어벨트는 부서져 움직이지 않았고, 우리는 주위를 기웃기웃 가방을 들어 올려야 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5박 7일간 우리의 필리핀 여정을 보살펴 주신 고마운 분들. 문철아저씨, 루디아저씨, 박현모 회장님 ⓒ열린의사회>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이른 아침,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24시간 치킨집에서 올 데이 브런치 메뉴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릇 한 켠엔 햄버거처럼 포장된 무언가가 놓여있다. 포장을 열면 나오는 것은 밥, 밥알이 날리는 까닭으로 마치 케잌처럼 꼭꼭 눌러 포장해 뒀다. 2000, 한국에서 유행했던 라이스버거의 패티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밥을 먹으면서 또 하나 배웠다. 필리핀에서의 모든 것은 “Slow food"라는 것. 피자 배달을 시켜도 주문부터 도착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한국에서 온 우리는 예상치 못한 느림에 당황했다. 이내 적응해서 남은 필리핀 봉사기간은 모두 Slow, So Slow에 익숙해 졌고, 마지막 날 예기치 못한 불행 앞 에서도, 지프니 안에서 웃고 떠드는 긍정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는 봉사단이 되었다.

 

도착 첫날 예정대로라면 오후 진료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일요일이었던 그날 현지의 원활하지 못한 협조로 도착 첫 날 맥아더 기념공원과 이멜다 하우스를 비롯해 아직은 회복되지 않은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한국전 당시 UN군 참전의 물꼬를 터 준 당시 의장도 필리핀 사람이었고, 일본의 3 6개월 지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맥아더의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것 등 많은 문화를 우리와 공유한 필리핀이었다.

 

해안가에 위치한 맥아더 기념공원은 더 없이 평안했다. 수평선을 마주한 잔디밭 위, 잘려나간 시멘트 기둥을 삐죽이 비집고 나온 휘어진 철근 덩어리가 아니었다면 태풍이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평화로웠다. 공원 아래를 지나는 하수도 주변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의 짝짝이 신발, 헤어져 구멍이 나 버린 빨간 티셔츠가 아니었더라면 타클로반이 수마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직은 가난한 도시라는 것을 깜빡할 만큼 새파란 하늘은 아름답기만 했다.

 

그리고 도착한 이멜다 여사를 기념하는 San nino 성당.

겉보기엔 화려해 보이는 이 곳은 입장할 때의 요금, 사진기 혹은 캠코더를 소유하고 촬영을 할 때 받는 추가 요금이 매겨졌다. 입장할 때 요금을 매기던 가이드는 성당 앞 좌석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불을 켰다. 그리고 1층의 손님 방 하나하나를 친절히 설명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우리 일행에게 1층 몇몇 손님 방에 남아있던 자개장을 이것도, 저것도 KOREA에서 왔다며 연신 소개해 줬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총 3층 건물을 모두 구경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귀한 보물은 다 가져다 놓은 듯한 이곳도 하이옌의 손톱을 피해가진 못했나보다. 3층 스테인드글라스의 곳곳, 중국식 도자기의 일부는 금이 가고 또 깨졌다. 비틀어진 채 말라버린 어두침침한 색의 커튼과 카펫도 원래는 훨씬 고운 색 이었다고 한다. 실제 우리가 만난 그 집은 그렇지 못했지만. 마닐라로 돌아갈 때 모두 싸 갔다는 3천 켤레의 구두만이 하이옌의 습격을 피한 유일한 보물인 듯 했다. 

 

꾸벅꾸벅 버스 안에서 졸아가며 도착한 해안가.

고개를 높이 쳐 든 배의 꼬리 뒤 진흙탕엔 어느새 집들이 빼

 

곡하게 들어찼다. 하이옌에 떠 밀려 해안가에 박힌 배 뒤편으로 얼기설기 대충 지은 집 이었다. 태풍의 습격때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빈민들이 새로 정착한 곳이었다. 선주는 배를 빼기위해 주민들을 쫓아낼 수도 배를 포기할 수도 없어 배와 사람의 공존이 시작됐다고 했다. 하이옌의 상처를 가장 잘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피곤한 첫날, 거나한 해물 그릴 요리로 배를 채우고 돌아오는 길, Fiesta 축제 알바를 하고 있는 가이드 R.M을 만났다. 아니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는 말에 숙소로 오는 길 부러 들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침엔 다른 마을 노래대회에 참가를 하느라 늦었다더니, 오늘 저녁엔 댄스 경연대회의 사회를 보고 있는 그였다. 고작 5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예정대로 피에스타를 즐기는 타클로반 사람들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그들은 성호를 그리며 욜란다(하이옌의 필리핀 식 이름)가 할퀴고 간 형제, 이웃을 위해 기도했다. 일상을 작년과 또 그 이전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그들 나름의 슬픔을 이기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Korea open doctors society를 소개하며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도착 2일째, 오늘도 Slow>

 

타클로반의 아침은 새벽녘 목청껏 우는 닭 울음과 함께 시작된다. 여덟 시,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숲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 도저히 길이 없을 것만 같은 곳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도착을 알렸다.

 

들었던 대로 농구코트를 진료 장소로 사용하기로 돼 있었다. 전기를 써야하는 치과는 보건지소 건물 안을 쓰기로 했고, 나머지 진료과와 약국은 천막이 설치되길 기다렸다. 일요일, 식당에서 만났던 Slow So Slow가 한 번 더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느긋한 시청 직원들은 천천히 또 천천히 농담도 주고 받고, 괜스레 농구공도 한 번 튀겨가며 천막을 설치했다.

<농구장에 설치된 첫 날 진료소 현장 ⓒ 열린의사회>

 

 

그렇게 천막이 완성되는 동안 의료진들은 수줍음이 많은 짐짐(8)에게 몇 번이고 말을 걸었다. 유치원생쯤 돼 보였는데 8살이란다. 학교도 다닌다고 했다. 필리핀은 한국과 달리 4월과 5월이 가장 더운 시기라 여름방학이 한창이었다.

 

“She is my mom" 분홍색 크로스백을 메고 임시 진료실 만들기를 도와주는 시청직원을 가르키며 한 딱 한마디, 그것이 짐짐이 우리에게 먼저 건넨 최초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말갛게 웃는 짐짐의 입은 사탕 때문에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여느 타클로반 아이들처럼 송곳니 하나는 까맣게 썩어있었다.

 <접수, 접수대 앞에는 필리핀에서는 귀하다는 물, 그리고 구충제 Albendazole ⓒ 열린의사회>

완성된 천막 아래서 진료와 투약이 시작됐다. 더운 농구코트 진료실에서 가장 유용했던 건 자원봉사자 김영지 선생님이 가져오신 튼실한 부채였다. 인천공항에선 미처 고마움을 몰랐던 부채, 바람한 점 없이 쨍쨍한 타클로반의 햇볕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우리들의 친구였다.

 <낯선 부황과 침, 한의과 치료를 받는 필리핀 사람들과 보훈처 양홍준 사무관님 ⓒ열린 의사회>

  <봉합 중인 외과 최석진 선생님, 이번 의료봉사의 단장 이시기도 했다. ⓒ열린 의사회>

치과가 진료하던 건물 안에도 싱크대 시설만 있을 뿐, 가동은 되지 않았다. 물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아침 진료를 시작하기 전 마실 물을 하나씩 쥐어주시며물이 귀한 곳입니다라던 박현모 회장님의 말에 그제서야 공감하게 됐다.

<치과는 한국에서건, 필리핀에서건 무서운 곳 이다. 진료중인 치과 김슬기 선생님 ⓒ열린의사회>

 

이날 진료소에는 어린 아이 환자들이 많았다. 대개는 피부병, 중이염을 앓고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의사, 시내 곳곳에 위치한 generic 약국 등 겉보기에 의료 접근성은 좋아보였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열악한 수도시설이 문제였나 보다.

<천사의 미소, 내과 박경아 선생님 ⓒ 열린의사회>

 

“What is Cimetidine?"

냉장고 없어요.”

 

첫 진료, 그리고 복약지도를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중이염을 앓는 아이들이 많았고, 부스럼과 고름 등 피부병을 주렁주렁 매달고 온 아이들도 많았다. 항생제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한국에서의 습관처럼 아목시실린 처방에 냉장보관을 말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말은 "No refrigerator, 냉장고 없어요였다. 찌는 듯 더운 날씨 습관처럼 당연히 냉장보관을 말했던 나는 처음 삼세판의 실패 이후 전략을 바꿨다. 일주일이 지나면 역가가 떨어지니 먹여선 안된다는 말, 선생님 처방대로 거르지 말고 약을 다 먹어야 한다는 말, 햇볕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하라는 말로 냉장보관을 대신했다. 

 

 

Generic 약국에서 Repeat 처방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말, 그리고 따갈로그어 대신 영어를 할 수 있는 주민이 많다는 것. 타클로반 주민들은 아는 것도 많았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치과 처방을 받아오는 사람들마다 솜을 앙 문채 힘든 발음으로, 혹은 약국을 다시 찾아와 묻는 말, “What is cimetidine?" 이었다. Gastritis, Gastric cancer 등등 Gastric이라는 단어만 읽고 쓰다 보니 Stomach이라는 쉬운 단어가 반나절도 더 지나서 생각났다는 건 이제서야 밝히는 비밀이다.

 

<진료 2일째, 건물 안이 훨씬 더워>

 

이틀째 진료, 아주 좁은 대지가 될 수도 있다는 예상과 달리, 현지 교회의 협조를 얻어냈다.

 <이틀째 진료장소였던 교회 - ⓒ열린의사회>

 

<진료소인 교회,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하늘이 보인다. 지붕이 없어서다 ⓒ 열린의사회>

교회를 빌렸고, 어제보다 순조로울 것처럼 보였다. 교회라고 부르는 곳도 철골만 그대로 서 있을 뿐 바깥의 집들과 비슷했다. 지붕은 UNDP UNHCR협찬. 바깥의 얼기설기 지은 집들처럼 천막을 얹었을 뿐이다. 하나 다행인 건 전기가 연결돼 있다는 것, 학교 급식소에서나 볼 법한 물건인 프로펠러마냥 생긴 선풍기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기가 연결되고, 치과 컴프레셔가 돌아갔던 데는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있었다. 장비 확인중인 박인철 팀장님 ⓒ 열린의사회>

진료가 시작되고, 시원할 줄만 알았던 건물 안, 강력한 선풍기는 환자에겐 행복이었을지 몰라도 약국에겐 재앙이었다. 너무 강한 바람덕분에 처방전도 약도 모두가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찜통 같은 더위 속에 모두들 향유하는 문명의 이기조차 약국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

 

가장 늦게 점심을 먹고(약국에서 일하는 한 모든 일정의 마무리가 이 곳임은 숙명이다.)있는 도중 물을 가득 머금은 천정이 한바탕 폭우를 내리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우리의 오전은 잘 마무리 되는 듯 했다

 

이틀 쯤 되고, 하루에 각자 백 명쯤 되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콩글리쉬와 필리핀 영어에 서로 익숙해졌다. 몇몇 단어만으로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만난 아홉 살 꼬마아가씨. 예쁘장한 얼굴로 내게 묻는다. 물론 영어로. “마리아는 한국어로 무슨 뜻이죠?” ... .... 마리아 이즈 마리아.

마리아는 한국말로도 마리아지. 그럼.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 리얼리를 되풀이하는 그 아이, 마리아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예스, 뿐이다.

 

어린 아이들이 잔뜩, 항생제 시럽을 몽땅 쓴 나머지 결국 유발과 유봉을 꺼내들고, 부족한 치과의 전기를 나눠썼던 하루였다. 아목시실린 그리고 떨어져 버린 암브록솔 시럽이 도착하기 전까지 잠깐이지만 포장된 약들과 시럽대신 갈고 부수고, 그 땐 앞이 깜깜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련의 시간이 짧게 지나간 것에 모든 일이 지난 지금은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아테놀롤 50mg만 챙겨져있는 약국. 어린 천식 환자가 먹을 별도의 약이 없었던 약국. 봉사지에서 으레 만날 수 있는 현실이다. 그래도 어떠한가, 약이 아주 없지는 않고, 아테놀롤이고 살부타몰이고 반 알로 자르기만 하면 그들에게 꼭 맞는 맞춤약을 줄 수 있는데 무엇을 꺼려한단 말인가.

 

<진료 3일째, 아른아른 눈에 밟히는 타클로반 사람들>

 

3일째 진료이자 떠나기 전 마지막 진료. 국내선 비행기 스케쥴 때문에 우린 오전밖에 머무를 수 없었다. 늘 대충대충 좋은 게 좋은거지 식이던 필리핀 시청 직원들이 오늘따라 매우 친절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찾은 동네는 진짜 피난처(Shelter). 하이옌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다.

 <진료소로 사용했던 피난처 - Shelter - 의 모습 ⓒ 열린 의사회>

약국은 어제의 찜통에 대한 보상인 듯 메인 천막 바깥에 자리잡았지만 그 덕분인지 사방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부채질 한 번 하지 않고도 오전 일과를 진행할 수 있었다. 원래 평평한 평지가 아닌 탓에 제멋대로 자란 풀들 마저도 낫을 가져와 베어주는 그들에게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서비스가 오전으로 한정되었다는 것이 그저 아쉬웠다.

<임시 천막 밖에 위치한 약국, 이 많은 종류의 약들로도 타클로반 주민들을 모두 도울 수는 없었다. ⓒ열린 의사회>

 

타클로반 임시 거주지에서 시작된 첫 진료. 으레 건네는 인사인 땡큐 맘 대신 땡큐 시스터를 외치며 접근해 오는 할머니, 적색신호다. 궁금한 것도 많고 두 번 세 번 묻고 또 묻는 할머니. 모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설명했다. 옆 자리에 앉아 묵묵히 벌써 3명째 복약지도를 해치우는 수정약사에 대한 미안함은 잠시 접어둔 채 였다. 땡큐 시스터를 외치고 돌아간 그 할머니는 한시간 쯤 지나 한창 바쁠 때에 다시 나타났다. 꼬리물기를 하듯 동네 친구 세 분을 주렁주렁 매달고 찾아왔다. 어김없이 땡큐 시스터를 외치더니 하는 말.

이 할멈, 이 할멈도 눈이 침침해. 아까 그 약 이치들에게도 좀 줘.”

아이쿠. 

 

마지막 날 날 당황시킨 두 번 째 환자. 시작은 늘 그렇듯 똑같았다. "이 약도 있어요?“

이 약도 있냐는 말은 내가 이미 약을 알고 있고,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나는 영어를 할 줄 압니다. 라는 세가지가 복합된 현장에서 가장 무서운 말 이었다. 물론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손짓 발짓을 해가며 한바탕 떠들고 나면 가장 나를 뿌듯하게 하는 분들이었지만.

 

오늘의 의뢰인, 그가 가지고 온 건 자신 몫의 발살탄, 그리고 아내의 약이라며 보여준 심바스타틴이었다. 20년 전 쯤 미국에서 발명 된 약들. 한국에서도 제법 고가에 속하는 편인 약들이었다. 그 후로도 혈압약은 같은 계열로만 7, 고지혈증약도 5개가 개발 되었으니 아주 새로운 약은 아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블록버스터 약들을 가지고 왔다는 것 만으로도 필리핀이 의료 낙후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기도 했다. 우리가 가져간 혈압약은 CCB인 암로디핀, 그리고 베타 차단제인 아테놀롤이 다 였다. 모자라는 약품은 아니었고, 혈압을 낮추는 효과도 탁월했지만 꼭 같은 약만을 찾는 타클로반 사람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순 없었다.

 

임시 거주지 내 고작 방 한칸 거실하나로 된 컨테이너 박스에 사는 그들은 늘 웃었고 행복했다. 성냥갑처럼 똑같은 곳에 살면서 어찌 행복할 수 있는지 묻는 내게 영지샘은 답을 주셨다. 대피 경보를 내렸을 때 TV가 있고, 자동차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수가 피난을 갔다고. 우리가 알고있는 오천이 넘는 이재민은 지금 이 쉘터에 모여있는 사람들처럼 내 몸 하나 뉘일 땅을 살 수 없어, 물가에 수상가옥을 지어야만 했던 빈자들이라고.

 

그러다 보니 처음 가진 내 집, 공동 수도와 공동 취사장이지만 불을 피울 수 있고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물은 그들에겐 처음 갖는 행복일 것이라고. 최악의 사태를 맞고 나서야 가질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아이러니 하긴 했지만 이런 내 생각을 무색하게 이곳의 사람들은 알록달록 커튼을 드리우고, 집 앞엔 꽃밭도 가꾸면서 오늘을 즐기고 있었다.

 

지난 주 케이팝스타가 다녀갔다며, 한국식 영어엔 익숙하다 웃어 보이는 이곳 주민들.(우리와 간발의 차로 엇갈린 아라우 부대를 방문했던 MBC 진짜 사나이팀인 것 같았다) 우리는 이들의 미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박현모 회장님과 필리핀 꼬마 ⓒ열린의사회><공항에서 나눠가진 폴라로이드, 마음 따뜻한 사람들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 열린의사회>

 

 

 

Posted by Ms.삐약이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